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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밤을 조려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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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파이

오랜만에 새로운 능력을 얻었다는 걸 깨닫고 흥분되는 마음으로 글을 시작합니다. 냉장고에는 화개장터에 갔을 때 빈손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산 밤이 있었습니다. 이로 깨물어도 흠집이 나지 않는 밤을 어느 세월에 손질해서 먹나 한숨이 나와서 건들지도 않았거든요. 가을이면 엄마는 어딘가에서 밤을 받아와 삶아놓았습니다. 삶은 밤은 식탁에서 오래도록 방치되었어요. 가끔 밤을 먹고 싶으면 온 힘을 다해 밤을 톱질하듯이 반으로 갈랐습니다. 포크로 속을 파먹는 일도 참 귀찮았습니다. 푸석한 밤을 열심히 파내봤자 입에 들어오는 건 별로 없어서 금방 시큰둥해졌습니다. 저는 만 원어치의 생밤을 사왔습니다. 시장 초입에서 제철 식재료를 판매하던 할머니 상인에게 적당히 달라고 했는데도 봉지에 밤을 한가득 담아주셨어요. 살다 보니 식재료를 쟁일 필요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고요? 아직 밤이 절반이나 남았습니다.
나머지 밤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밤조림을 만들기로 결심했어요. 밤조림을 만드는 영상은 수도 없이 봤습니다. 다른 사람이 밤의 겉껍질을 벗겨내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았습니다. 영상의 길이는 짧지만, 밤조림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고된 과정이 필요한지는 영상에 달린 댓글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어요. 영상 보고 그냥 사 먹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준비물에 정신력이 적혀있는 거 왜 이리 웃기지ㅋㅋㅋ 손수 해내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서 시도조차 하기 어려운 일을 담은 영상에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이 대주제 안에서도 다양한 소주제가 존재합니다. 모든 사람이 천편일률적인 취향을 갖고 있을 리 없죠. 저는 특히나 디저트를 만드는 걸 보며 시간을 흘려보냅니다.
밤조림을 만드는 첫 단계는 껍질 까기입니다. 동네에 있는 ‘밤껍질 까드립니다'라고 적혀있는 트럭에 가서 기계로 깎아달라고 말하면 되지 않냐고요? 겉은 깎되, 속껍질은 남겨둬야 제대로 된 밤조림이라서 작은 칼을 이용해서 손수 손질해야 합니다. 밤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휩싸인 채로 밤껍질을 까봤습니다. 왼손엔 밤을, 오른손엔 과도를 들고 밤을 까보기 시작했습니다. 사과를 깎듯이 얇게 껍질만 도려내면 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칼을 겉껍질과 속껍질 사이에 살살 밀어 넣습니다. 그리고 작은 힘으로 살살 껍질을 뜯어냅니다. 덜렁거리는 손톱의 끝부분을 뜯어내듯이 말이에요. 칼에 엄지를 베일 듯해 긴장되었지만 부드러운 털만 남은 밤을 보면 뿌듯해졌습니다. 과도를 들 때면 손이 벌벌 떨렸는데 팔백 그램이나 되는 밤의 외피를 다 깎아버렸습니다. 밤 깎기 스킬이 추가되어 기쁜 마음으로 바로 글을 써버렸어요. 이젠 남은 밤을 까러가야 하거든요. 닳은 책상 모서리같은 촉감의 밤을 베이킹소다를 푼 물에 밤새 담가 두어야 합니다.
밤을 깎을 땐 몰랐는데 엄지손가락에 생채기가 났더라고요. 분명 피는 나지 않았지만, 빗금이 몇 개 그어져 있습니다. 칼에 베이기 직전까지의 상처만 남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잠에 들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밤과 물이 담긴 냄비를 가스불 위에 올려놓고 책을 읽었어요. 엄지손가락이 종이에 닿는데 걸리적거리고 아렸습니다. 손가락에 반창고를 두르고 책에 집중했습니다. 밤새 밤을 담가놓았던 물은 까맣습니다. 가장 바깥의 밤 껍질 색보다 훨씬 진했어요. 밤의 속껍질은 확연히 다르게 옅었는데 말이죠. 달걀을 만질 때면 닭의 깃털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달걀로부터 보송한 털을 조심스럽게 떼어내었는데 어제 만진 속껍질의 감촉 같았습니다. 밤을 삶으면 밤의 솜털을 떼어내기 쉽다고 했어요. 독서하면서 밤이 잘 조려지기를 기다렸습니다. 물이 펄펄 끓을수록 밤꽃 향기가 짙어집니다. 밤을 두르고 있는 뾰족한 가시도, 나뭇가지도, 나뭇잎도, 꽃잎도, 꽃가루도 없는데 도대체 이런 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밤을 까다 보면 가끔 일부가 물렁한 걸 발견합니다. 가르면 역시나 속이 텅 비어 있고요. 그런 밤을 그냥 버리기엔 아까워서 썩은 부분을 도려내어 먹어봤습니다. 생밤은 촉촉하고 달콤했어요. 밤이 끓는 물에서는 생밤 맛이 나지 않았으니깐 속껍질이 뿜는 향일까요? 얼마 전에 동네에 있는 야트막한 산을 올랐습니다. 조금 걷자마자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놀라서 나무 위를 쳐다봤는데 청설모가 있었습니다. 얇은 가지를 곡예 하듯이 유연하고 재빠르게 돌아다니는 모습에 웃음이 났어요. 조금 더 걷다가 입에 밤톨을 물고 있는 다른 청설모를 만났는데 기뻐 보이는 몸짓에 또 실실 웃음이 났어요. 그러고는 산길을 오르고 내리다 만난 밤 줍는 사람에게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밤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위로 옆으로 뻗어나갔습니다. 아마 나무 각자가 이토록 견뎠기에 산으로 불릴 수 있었겠죠. 그다음으로 밤나무는 무엇을 위해 사계절을 견디며 열매를 맺었을까요. 딱딱한 신발 밑창으로 밤송이 가시의 배를 고민 없이 갈라버리는 인간을 위한 것은 아닐 겁니다. 밤도 괘씸하니깐 더욱 단단해졌을 거라고, 인간의 언어로 쉽게 풀이될 수 없는 향을 가둔 거라고 상상해 봅니다.
밤물을 우리고 버린 후에 새로운 물에 끓이기를 반복했는데 까만 색은 옅어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엔 간장, 위스키를 넣고 한소끔 끓였습니다. 현관문을 열어 복도의 옆집들, 윗집, 아랫집에 냄새가 퍼지도록 두었습니다.
엄지손가락의 상처가 거의 다 아물었습니다. 목욕할 때마다 고민했었습니다. 이 정도의 상처는 별것 아닌가? 친구에게 다쳤다면서 칭얼대기에는 작은 상처였습니다. 다시 밤조림을 만들 때쯤엔 밤 껍질을 까느냐 상처가 나서 한동안 일상에서 불편을 겪었다는 사실이 기억에 남지 않겠지요. 글로 적었으니 어렴풋하게나마 재현되려나요. 아무튼 유독 예쁜 밤조림 하나를 골라서 먹어보았습니다. 저녁 무렵에 길거리에서 율피가 드러난 밤을 판매하는 상인을 보았습니다. 생고생하며 밤을 깠는데 돈을 주면 살 수 있다니. 충격을 받았습니다. 할머니 상인을 지나치면서, 조금 더 사서 밤조림을 쟁일까 고민했는데 사 올 걸 그랬습니다. 어서 집에 놀러 오는 사람에게 맛보여 주고 싶습니다.